며칠째 비가 온다. 컨테이너 하우스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함석지붕보다 더 요란하다. 천지 사방으로 비의 장막을 친 듯하다.
최근 핀셋으로 호접난 포트 주위에 난 풀들을 뽑았는데 저녁에 혼자 밥먹다가 산밭에서 생전의 할머니가 김을 매시던 모습이 떠올려졌다. 똑같은 밭에 어느 해는 참깨, 어느 해는 콩, 기억 속에 메밀도 심으셨다. 그 밭에 자랐던 작물들을 떠올려보지만 몇 가지에 그치고 만다. 호미로 자갈을 골라내시고 풀을 매시던 모습을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건다. 모내기, 고추 모종, 이런 얘기는 도시에 살면서 나 역시 철을 잃고 말았다.
비바람에 고추 모종한 비닐이 다 벗겨졌다며 속상해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상황이 나에겐
심각하게 와 닿지 않는다. 고작 내가 하는 말은 다시 씌우셔야겠네요, 저녁은 드셨어요? 그 뿐이다. 통화시간도 2분 안팍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좀체로 시골에 전화하는 일도 고향집을 가는 일도 아주 희미해졌다.
할머니와 전화통화를 했을 때 나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이젠 다 잊어버렸다.
가족이 다 모여 저녁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마당에 닭들을 풀어놓고 닭이 앞집 배추밭에 들어갈까봐 마음을 조리며 밥을 먹어도 그때는 너무나도 평범한 날이었다. 그 평범한 날이 훗날에 그토록 평화스럽고 아늑한 것을. 다시는 만져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밥 짖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살기 편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윽한 정취는 옛날을 따라갈 수 없나보다.
사라진 우물터, 신작로, 산이 밭이 되고 마을에서 하나 둘 잊혀져 가는 사람들. 앞으로 빨리 달려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뒤에서 더 멀어져간다. 풍경처럼.
지금 내리는 비를 데리고 바닷가 근처로 가서 몇 날을 흘려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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