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산책 좀 다녀올까 한 것이 오후가 다 지나가버렸다. 무엇을 하기 위해 마음을 먹지만 대다수 허사가 되고 만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러했고 약속을 하는 일도 그랬다. 시간이 많아도 시간이 늘 부족한 듯 달리의 그림처럼 늘어지거나 널부러졌다. 전체적인 나의 일상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용하지만. 정신세계도 몸과 더불어 하나의 덩어리처럼 침대 위에 뒹굴었다. 나는 물질로만 존재할 뿐이다. 때로 가끔 석공이 바위 같은 날들을 깨고 건져주길 바라면서 내 고유한 생각과 영혼이 살아나길 기도한다.
조카를 등에 업고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듣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3악장에 와서 조카는 좁은 내 등에서 잠을 잔다. 어느 날은 베토벤의 운명을 들려주었다가 며칠 지난 후 베토벤이란 이름을 기억해내는 조카를 본다. 나는 매일 시들어가고 조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 대신 나는 음악으로 내 영역을 변덕스럽게 표시해볼 수밖에. 방안에 광폭한 기운이 돌았다가 바흐의 일정한 선율로 돌아오기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을 오가는 마음속의 격자무늬들. 작고 하찮은 심사와 싸우기도 한다.
나는 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그것은 먼지처럼 보이지 않아서 때로 보잘것없어 보였다가 그저 방 안의 책처럼 방치했다가 어느 한순간 내 뒷통수를 사납게 슬프게 내려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섣부르게 행복할 수 없다. 작은 방에 갇혀 그립다고 말해본다. 그러나 사람이, 추억이, 여행이, 바다가...
다섯 장으로 된 자서전
1 나는 길을 따라 걸어간다.
포장된 길에 깊은 수렁이 있다.
나는 그곳에 빠진다.
나는 길을 잃었다. ......나는 희망이 없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빠져나갈 길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2 나는 같은 길을 따라 걸어간다.
포장된 길에 깊은 수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한다.
나는 다시 그곳에 빠진다.
내가 같은 수렁 속에 빠져 있음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빠져나가려면 여전히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3 나는 같은 길을 따라 걸어간다.
포장된 길에 깊은 수렁이 있다.
나는 수렁을 보았다.
나는 또다시 거기에 빠졌다. ......그것은 습관 때문이다.
내 눈은 열려 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나는 안다.
그것은 내 잘못이다.
나는 즉시 빠져나온다.
4 나는 같은 길을 길을 따라 걸어간다.
포장된 길에 커다란 수렁이 있다.
나는 비켜서 간다.
5 나는 다른 길을 따라 걸어간다.
* 포티아 넬슨(Portia Nel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