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것 같은 음울한 날이다. 하늘에선 눈을 내릴까, 비를 내릴까 고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렵게 수술을 끝내고 겨우 살아나 회복기에 접어든 사람이 담담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세상의 빛깔.
말러의 아다지에토와 같은 날씨다. 나는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처럼 차분하고 말 없는 오후를 보낸다.
이런 날씨가 한 달 정도 내게 찾아와 주었으면 싶다. 외부의 영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방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겠지만 내 방에 죽은 채로 벽에 걸려 있는 시간처럼 정지되어 있는 것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인터넷에서 알제리라는 나라를 검색해보았다. 요즘 나는 카뮈의 산문을 읽고 있는 중이다.
알제리와 지중해 그리고 카뮈. 그를 고작 묵직한 소설과 시지프 신화로만 만났을 뿐인데 최근
깊은 밤 라디오 프로에서 티파사에 관한 구절을 언급한 바람에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문장에 매료되었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야생의 향기와 졸음을 몰고 오는 풀벌레들의 연주 속에
파묻혀서 나는 열기로 숨막힐 듯한 저 하늘의 지탱하기 어려운 장엄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연다. 본연의 자기가
되는 것, 자신의 심오한 척도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슈누아 언덕의 저 단단한 등줄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의 가슴은 어떤 이상한 확신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나는 숨쉬는 방법을
배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을 완성해가는 것이었다."
햇볕으로 성벽을 둘러싼 듯 그의 문장들을 보면서 어떻게 글자가 자연 앞에 펼쳐진 풍경을 압도할 수 있는지
눈부셔서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것은 마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숨을 참으며 읽어내려가기도 한다. 왜 이제야 만났는지. 그러나 오래 물 속에 숨을 틀어막고 있을 수는 없다.
말러의 5번 아다지에토를 들으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토마스 만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루치오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소설에선 작가이지만 영화 속엔 작곡가인 아셴 바흐가 바다를 앞에 두고 의자에서 팔을 떨어트리며 숨을 거두는 장면... 그가 사랑하던 소년 타치오. 내 기분에 따라 어떤 땐 말러는 죽음 너머의 작곡가처럼 다가온다. 잔잔한 해변가를 거니는 듯한 게리 베리티니, 좀 거친 파도 같은 한스 스바로프스키, 폭풍처럼 다가오는 키릴 콘드라신을 새삼 일기를 쓰는 동안 차례차례 들어보았다. 내게도 아셴바흐가 타치오를 그리며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