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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

꿈 하나, 영화 하나


어제, 오늘 하루도 정갈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하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지금보다 훨씬 책들이 많았는데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갯벌 한가운데 도서관처럼 진열되어 있던 내 책장들이 바닷물이 들이치는 바람에 놔두고 도망쳐 나와야했다. 순간 난 어떤 책을 살려야할지 허둥지둥하다 모두 놓치고 나중엔 떠밀려온 책을 몇 권 줍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바닷물이 얼마나 빨리 밀려오던지, 책을 주우러갔다가 그만 그 시퍼런 물에 겁이 나기도 했다.

웃긴 건 내가 주워온 것 중에 앞장이 뜯긴 <막간>이란 책이다. 그 책의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라 차이콥스키였다. 이런 개꿈이 다 있나.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읽다 잠이 들었던 탓일까. 아니다. 책을 펼쳐도 생각들이 사방에서 밀려와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이란 것도 제각각 흩어져버리고는... 

꿈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날이다. 아무한테서 연락이 없다. 조용하고 쓸쓸한 노후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 주 폴란드 영화 "죽어야 할 때"를 보았다. '아니엘라'라는 할머니와 '필라'라고 부르는 개가 영화 속 주인공이다.
이 둘은 햇볕이 잘 비치는 외곽의 별장 같고 창문이 많은 오두막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할머니의 희망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수하고 아들 부부와 함께 사는 것이지만, 아들의 진짜 속셈은 딴 데 있다.  또한 이웃집 사람 역시  할머니의 땅을 노리며 그 자리의 오두막을 허물고 새 아파트를 짓고 싶어한다.

할머니 아니엘라의 유일한 낙은 옆집과 시끄러운 음악학교 학생들을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것이다. 발레복을 벗지 않으려는 아이를 보며 회상에 잠기기도 하고 아마 첫사랑?을 떠올려보기도 하면서 일과를 보낸다.  

내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동물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초월하는 할머니와 필라델피아와의 교감이다. 

사방이 어둑해지고 새소리 들려오는 저녁무렵, 의자에 앉아있는 아니엘라는 말한다. "이제 조용히 죽을 수 있겠어... 아, 누군가 나에게 따끈한 차 한 잔 가져다주면 좋으련만.... 차가 안 되면 술이나 한 잔 하지 뭐"  술을 한 잔 따라마시던 아니엘라는 이웃집 젊은 여자를 욕하기도 하며 어떻게 똑같은 일상을 두고 다들 지겨워하지 않는지에 대해 얘기하며 필라에게도 술을 권한다.

가끔 나 역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모두가 아름답게 살기만을 원하고 죽음에 대해선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편으론 아름답게 죽는 방법을 내게 알려준 셈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의자를 동경하며. 




소네트 73


그대 나에게서 늦은 계절을 보리라.
누런 잎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이
삭풍에 떠는 나뭇가지
고운 새들이 노래하던 이 폐허된 성가대석(聖歌隊席)을

나에게서 그대 석양이 서천에
이미 넘어간 그런 황혼을 보리라.
모든 것을 안식 속에 담을 제 2의 죽음,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그대는 나에게서 이런 불빛을 보리라.
청춘이 탄 재, 임종의 침대 위에
불을 붙게 한 연료에 소진되어
꺼져야만 할 불빛을.

그대 이것을 보면 안타까워져
오래지 않아 두고 갈 것을 더욱더 사랑하리라.



세익스피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