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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병원을 지나다

월요일 아침, 만원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았다. 똑같은 시간대에 나와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그리고 언제나 똑같이 창밖의 풍경들과 함께 흔들리며 지나가지만 내겐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보고 싶은 것보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더 많아져서인지 모른다. 버스가 신호대기였는지 갑자기 멈춰섰다. 창밖으로 동물병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수의사였는지,  밤동안 울부짖다 고요해졌을,  밤새 그의 기척을 기다렸을 동물병원의 문을 그가 막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츄와 말티스 두 마리가 빙글빙글 자신의 주위를 돌며, 또 그를 에워싸며 너무나도 반갑게 너무나도 간절히 출근한 그를 맞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굳은 얼굴에서 그 어떤 동요나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도 똑같은 일상에 시달리는 나와 같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와 같았던 것이다.
아침에 보았던 헌신적인 그 개 두 마리가 밤이 되어서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 정황이 다시 그려지면서 슬퍼진다.

십 년 전, 까치에서 나온 "코끼리가 울고 있을 때"를 읽으며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게 했던 구절이 있다.

다윈은 동물의 고통과 헌신적인 사랑 사이의 관계에 대해 썼는데 개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주인을 위로하는 경우가 흔하며 심지어 생체해부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수술자의 손을 핥아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개를 수술한 사람은 가슴이 돌이 아닌 이상 죽을 때까지 회한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것이라며...

어쨌든 내겐 그 모든 사랑을 막론하여 사랑에는 외로움을 그 배로 떠안고 있다. 외로움의 깊이를 사랑으로 채우고 싶지만 물과 기름의 비율처럼 그게 뜻대로 잘 안된다.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것만큼 나무토막처럼 메마르고 황량한 삶이 또 있을까. 이렇게 말은 쉽지만... 이 글을 쓰는 영혼은 날마다 가슴에 모래가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