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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내가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은 시월이다. 물론 십일 월의 쌀쌀한 듯 맑은 기운 아래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공터 앞 이제 서서히 비울 준비를 하는 너그러운 나무들,  내 방 안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옮겨가는 햇볕의 앙증맞은 걸음걸이도 아름답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조용한 평화가 비록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한순간 내 몸을 욱죄이게 하던 것들을 잠시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내가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가벼운 비애 또한 잊게 한다. 엄마의 정수리에 피어난 흰머리와 회복할 수 없는 세월을 잊는다. 조카의 눈을 맞추며, 티없이 맑은 눈동자를 보며 너의 10년, 2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다 마음이 슬퍼져 이내 지워버린다. 조금씩 날마다 어떠한 사건이나 어린시절의 추억으로부터 멀어지고 잊혀지지만 나는 그 낌새만 알아차릴 뿐, 풍경들은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