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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십이 년은 이승, 십사 년은 저승인 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실천문학의시집 106)

   어느 세월, 이 세상 어딘가에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분명 내 짝일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 사람도 나를 몰래 바라보며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도.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이 몹시 그리웠다. 어디 둘 데 없이 두문불출한 마음이 찾는 곳이란, 단 한 그루의 나무줄기 둘레에서 마젤란의 세계 일주 여행을 하며 일생을 보낼 수 있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말에 참여하여 그리운 사람을 종종 곁에다 두고 다른 세계의 언어로 얘기하며 살기를 소망했다. 다른 세계 속의 언어를 빌려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면 그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일 것 같았기에 한때는 그러한 꿈이 날 살릴 것도 같았다. 그러나 꿈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여기, 한참 주저하다가 심호흡 한 후 나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 억겁의 거리를 순간이 다가가 건드린 시간의 만행을 어떻게 불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음속의 무덤은 따뜻하다. 그러니 마음속 무덤은 여기 있고, "적막한 방"이다.

   처음 나는 '무릎과 가슴 사이의 빈 공간에서 쉬는 숨'의 시 구절에서 고흐의 그림을 연상했다. 고흐가 사랑했던 여인 크리스틴을 대상으로 그린 "슬픔". 적막한 방에 누워 있는 그녀가 혹시 고흐의 이 그림에 비유한 데 대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언젠가 "적막한 방"이 고흐의 어떤 그림을 닮았다고만 얘기했을 뿐, 직접적으로 그림의 제목은 밝힐 수 없었다. 왠지 말하기가 그랬다. 그렇찮아도 지병처럼 아파서 누워 있는 그녀에게 고흐의 슬픔까지 얹으면 한없이 가라앉을 것만 같았기에. 그렇게 내 방에 크리스틴이 있었던 것처럼 적막한 방에는 그녀가 있었다. 하염없이 슬픈 것들이 녹아서 깊숙한 저 아래를 유령처럼 떠도는, 어디로 스미거나 사라지지도 않는, 때때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그녀를 통해 전해져 왔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친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 나는 그 숨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크리스틴의 무릎과 가슴 사이로 통과 시키곤 했다. 그러나 여기 이기지 못한 숨들은 고스란히 적막이 되었다. 적막에게 지는 숨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내 영혼이 그녀의 詩를 따라갈 수 있을는지.

  가끔씩 詩란 무엇인가,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때가 있었다. 자신이 미처 몰랐던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영혼을 만나는 장소라고 느끼는 것, 자신도 몰랐던 영혼을  본질이라고 해도 될지 싶지만 나는 나의 본질이 궁금할 때 그녀의 시집을 들춰보곤 했다. 으레 시가 시인을 만나게 하는 것일텐데, 한때 얕은 생각으로 시와 시인 사이에 거리감으로 나는 그 모면할 수 있는 길이 오히려 시인을 만나지 않는 게 나으리라 보아왔다. 간혹 어떤 시가 좋으면 그 시를 위해서 시인을 잊어버리자 싶은 예의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우연한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고 시와 시인이 일치함을 느꼈다. 진정성이란 마치 시인과 시가 한 몸으로 만날 때 생기는 감정일까, 시집을 다시 펼쳤고 오래 뺑개쳐두었던 마음이 다시 저려왔다. 시가 너무 아파서 시인을 못 알아봤던 것인지.

  이 시집 속에는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무덤에 가서, 그 무덤 주위에 자라는 긴 풀들을 뽑으며 그 뽑은 풀들이 수북하게 쌓일 때 그 풀무덤으로 떠난 사람을 더욱 아프게 잊으려는 심정이 들어가 있다. 고요한 무덤 곁에 풀무덤으로 대신하는 사람의 슬픔.
  나는 시집 뒤에 적힌 시인의 말이 그녀 시집을 전부 소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치유되는 아픔이나 상처, 나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래오래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여운을 주는 시인의 말이 달빛이 되어서 시집 속의 길을 환히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아픔이 좀 더 세상으로 퍼져나갈 수 있기를. 나는 그녀에게 못 다한 말이 참 많다. 내 말이 그녀에게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기 전에 어떤 소통의 불편함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시는 늘 나에게 꿈 같다.


1998.

* 여기서 시집의 제목은 독일 영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