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diana, Michael Hoppe
여기 또 다른 삶, 그루터기에 앉아 - 마이클 호페[Melancolie]
가끔 어느 번잡한 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다말고 나는 문득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떼기 싫어질 때가 있다. '오래 전에 말이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발길을 향하던 목적지를 까맣게 잊고 나를 지나치게 간섭하던, 조금 전의 세계가 나와 무관한 듯 주위의 풍경들이 아지랑이처럼 낯설게 펼쳐진다. 여긴 어디인가.
어쩌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한 몸의 섣부른 저항 같다. 조악한 빌딩, 시간 속에 갇혀 줄지어 멈춰있는 차들, 매연과 소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나무들과 메마른 보도블록의 틈을 비집고 자라는 풀들. 우리가 좀 더 다르게 살아보고자 한 진정한 꿈은 언제 그곳에 가닿게 되는 것일까. 숨가쁜 현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질까 늘 불안해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과한 투자를 했음에도 날마다 조금씩 몸과 정신은 피폐해진다. 모두가 염원하는 삶이란, 애초에 다시 고쳐 살아보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 순간을 이미 지나쳐오면서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설령 애타게 찾았던 것이라도 그것이 인생에서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언제 받아들이고 깨닫게 될 것인가. 때로는 안락하고 아늑한 희망이 삶을 황폐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늘 외롭다. 너무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왔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던 영혼을 깊은 심연에 가두었기 때문에.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 한 번도 밝고 따뜻한 햇볕 한 줄기 쬐어본 적이 없이 그저 웅크리고만 있었을 슬픔, 분노, 아픔들... 이렇게 갇혀있던 마음속 슬픈 그림자들은 자꾸 삶 밖에서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움켜쥐게 한다. 공허하고 허전한 자리만 커갈 뿐.
내면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길 - Michael Hoppe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 내 마음에 와 닿는 음악은, 침묵 안에서 자신과 영원히 화해할 수 없으리라 믿어왔던 세계로 조용히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날카롭고 모서리 진 영혼을 조약돌처럼 둥글게 부드럽게 펴주면서 새로운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던져주는 것, 마이클 호페의 음악은 그런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사실 마이클 호페 자신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전업 음악가이기 전, 'PolyGram'이라는 세계 최대 음반사에서 거의 15년 동안 뉴에이지와 프로그래시브 분야의 뮤지션들을 발굴한, 음반업계에서 탁월한 매니저 겸 프로듀서였다. 그는 참으로 많은 걸출한 아티스트들을 탄생시켰다. 이렇게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마이클 호페가 음악가의 길을 택하게 된 데에는 그의 손에서 빛을 보았던 아티스트 중 반젤리스의 권유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왜 다른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음악을 통해 늘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그의 인간적인 성품, 사소함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 언제나 작고 소박한 일상을 담은 이야기 속에서 한 음 한 음 여백을 안겨주는 음표들이 말해주리라.
마이클 호페의 음악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솔직히 내겐 그의 행보 말고도 너무 광범위하다. 그는 2003년 앨범 <Solace>와 <Romances for solo Piano>로 두 번이나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었다. 그의 음악은 팜 스프링 국제영화제 페스티발과 산타 바바라 국제영화제의 공식음악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ALS협회(미국의 루게릭병 퇴치 협회)의 TV 광고 및 전미 유방암 인식 캠페인 PSA (Public Service Announcement)에서도 사용되었다. 심지어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을 비롯하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나 워크숍에도 인용해왔는데, 이처럼 세계 곳곳이나 사회 각 단체에 음악가로서 그가 알려진 데에는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 치유 방안에 그의 음악도 속해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마이클 호페의 주변에는 언제나 훌륭하고 멋진 친구들이 많다. 그의 음악에 시(詩)의 혼을 담은 마이클 요크, 반젤리스, 첼리스트 마틴 틸먼, 팀 위터 등 그래서 그는 솔로 앨범보다 다양한 연주자와 가수가 참여한 앨범이 더 많다. 지난 해 플루트 연주자인 팀 위터와 함께 한 <The Yearning>, <The Dreamer>, 그리고 <Homeland> 앨범에 이어 2008년, 이번에는 젊은 하모니카 연주자인 조 파워스(Joe Powers)와 같이 작업한 <Melancolie>를 내놓게 되었다.
하모니카 소리로 찾아가는 먼 여행
세계적 명성의 하모니카 비르투오조 조 파워즈는 갓 한 살을 넘겼을 때부터 (정확히 말하면 19개월 때부터)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그는 재즈와 탱고, 그리고 블루스와 아방가르드 실내악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그 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로 하모니카 연주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엔 자신의 탱고 독주 앨범 <Amor de Tango>을 내놓았는데 '조'의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확실히 하모니카란 악기의 특징이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시간의 속성을 다시 역으로 바꿔놓는 듯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 하듯 아련한 추억으로 징검다리를 건너게 한다. 왜 우리는 영원히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없음을 알면서 자주 그 사실을 잊는 것인지. 모든 지나간 날들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될, 인생에서 가장 고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 나는 마이클 호페의 <Melancolie>에 담긴 음악들이 그때 우리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바라보게 될 풍경과 많이 닮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늘 바라보며 꿈꾸는 풍경화를 삭막하고 답답한 이 도시의 배경에 걸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슬그머니 내 풍경화도 한 점 걸고 싶다. 조금은 삐뚤면서 엉뚱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날, 나는 커다란 창문 앞에 와 서 있다. 창 밖에는 억새가 만발하게 펼쳐져 있고 노랗게 붉게 들판을 서서히 물들이는 저녁노을 사이로 새떼들이 또 하나의 지평선을 만들며 날아간다. 어느 새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첫사랑, 조용한 항구도시의 바닷가, 섬의 밤하늘에 떠있던 수많은 별들, 파도소리, 늦가을 어느 붉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그리움을 그 새들의 먼 여정에 실어보는 생각을 하며.
이번 <Melancolie>를 통해 지난 날의 불행에서 벗어나길 기원한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선율처럼 세상이 얼마나 눈물나게 아름다운지, 다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길...
글 / 서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