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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

새들을 찾아주세요


몇 해 전 옥탑방에서 살았을 때 깨진 액자를 다시 맞추었다. 시로만 접했을 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H선생님이 직접 그린 판화이다.


원래 이 판화는 S선생님의 화장실에 걸려 있어야 할 운명이었지만, 우연찮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2000년 H선생님의 '오월의 신부' 연극을 할 때쯤이었다. 그때 나는 S선생님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났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S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오월의 신부' 초대권이 생겼다며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네가 시간이 있으면 보라고 하시면서 주최 측에 초대권을 내 주소로 보내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끝내 그 비싼 초대권은 연극이 끝난 다음에야 도착했지만.


그 이후 얼마 지났을까, S선생님의 이름으로 내 집에 낯선 우편물이 도착했다. H선생님이 그날 초대했던 몇 몇 문인들에게 성의 표시로 판화를 직접 그려서 부치신 것이다. 판화와 함께 졸작이지만 화장실 같은 데 걸어놓으라는 글을 써서.  나는 S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H선생님의 판화가 내 주소로 잘못 왔다고 전해드렸는데 S선생님은 기왕 네 집에 왔으니 네가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내 책상 위에 있게된 판화는 내게 와서 호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화장실 같은 데 걸려있지 않으니까.
어쨌든 액자를 다시 맞춘 건 2월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오후에 옷을 몇겹 껴입고 반포대교까지 한강가를 거닐다 돌아왔다. 자전거 도로 옆에 사람이 걸어다닐 수 있게 예쁘게 꾸며놓은 길을 따라 걸으면서 아직 봄까지는 멀다고 생각했다. 청둥오리 몇 마리, 새끼 오리 두어 마리만 강에 떠있을 뿐. 내가 몇 년 전에 보았던 철새들은 올해도 오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무엇을 해야하나. 통장의 잔고는 줄어가고...

손목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려올 뿐 지독하게 고요한 밤이다.


몇 해 전 한강에 왔던 그 철새들, 그리고..
A. Scriabin, Piano Concerto Op.20, 2악장, Solomon (piano),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